Gran Paradiso

선택적 지각

by Hanjun on Jun.09, 2008, under Barrel

우리는 제한적인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정보들을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정보들을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1950년대말 Donald E. Broadbent에 의해 만들어진 이 인지 모델은 Selective Perception 라고 불리어 진다. 이러한 선택적 지각은 무의식중에서도 일어나고 (Cocktail party effect), 의식 상태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의식 상태에서의 선택적 지각의 예를 보자.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타이슨 푸드를 비롯한 몇몇 미국 축산 업체들이 자발적으로 월령을 표시하겠다고 발표 했을때, 이익에 눈이 먼 미국 업체들의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입장을 가진 임현조의 발언에 대한 반박으로 돌고 있는 소문(누가 맥도날드 본사에 가서 Peter Stern이라는 마케팅 담당 부회장을 만났는데 자기네들은 30개월 이상의 소나 내장등을 쓰지 않는다는 글)은 대체로 믿을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글 자체도 진위 여부를 알 수가 없고, 맥도날드 본사에 그 사람이 있는지도 알 수 없고, 그 사람이 확실한 정보를 알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다른건 다 제껴두더라도 맥도날드의 말 자체를 믿을 수가 없을텐데 말이다. (이전부터 맥도날드는 미국 자본주의와 경제적 제국주의의 대표적 아이콘이 아니었나?)

물론 이러한 선택적 지각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특성으로, 무의식중에 일어나는 선택적 지각은 도저히 통제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모든 정보들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중립을 유지하려고 한다면, 지속적인 선택적 지각이 누적되어 완전히 편향된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없다면 점차 자신이 만든 모래성은 굳건해 지고 편집증적 경향을 띄게 될 수도 있다. 집단인 경우 Groupthink에 의해 이런 위험성은 더욱 증대된다. 아무래도 여러명이 강경하게 맞다고 주장하면 쏠리게 마련이니까.

그럼 이번 쇠고기 파동을 팩트에 기반한 논리적 해명으로 진정시킬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앞서 말한 선택적 지각 덕분에 정부의 해명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집단이 힘을 모아 쌓아 올린 모래성은 상당한 높이와 견고함을 자랑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가령 폭력을 예로 보면, Henry David Thoreau의 Civil Disobedience나 Fraktsiya 음모론 등 오만가지 변명이 넘쳐난다. 모래성이 쓸만하니 해명이 통할리 없다. Paranoid를 치료할 때는 단박에 모래성을 발로 까부수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우선 매우 긴 시간에 걸쳐 상호간의 신뢰를 구축한 다음, 조금씩 모래성을 허물어 나간다.

사실 해명으로 이번 사태를 진정시킬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이번 시위의 초점이 쇠고기가 아니라 이명박이니까. 이들의 주장은 수입하지 말라는게 아니라 이제 그만 내려오라는 거다. (덤으로 조중동도 타겟 중 하나다) 그러니 이 사람들에게 쇠고기 이야기를 아무리 잘해봤자 소용이 없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몇일 전까지만 해도 이 사실을 잘 모르는것 같았다)

여기까지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누군가 네게 다가와서 ’2000억 가질래? 아니면 대통령 할래?’ 라고 선택권을 준다면 주저하지 말고 ‘저는 2천억원을 받겠습니다’ 라고 외쳐야 한다는 이야기다. 1억 vs 대통령이라도 1억을 골라야 한다. 아니 네가 가진 돈 1천만원 뺏어간다 vs 대통령 시켜준다 중에서 택일하라 해도 1천만원 내는 쪽을 골라라.

요즘과 같은 인터넷 세상에선 대통령 만큼 안좋은 직업도 드물다. (꼭 우리나라 이야기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안에 대해서 즉각적인 반응을 원하는데 사회 시스템상 매 사안마다 신속하게 대응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의 불만은 계속 누적될 수 밖에 없다. 가령 법으로 정해야 하는 문제 같은 경우 국회를 거쳐야 하는데, 이 경우 상임위의 예비심사, 법사위 법률심사, 본회의 의결과 같은 절차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 절차들은 통상 빠르게 진행시킨다 해도 20~30일은 걸린다. 근데 사람들은 20~30시간 안에 반응하길 원한다. 이러니 뽑아놨더니 하는게 없다 소리가 나올 수밖에. 게다가 언론은 밥먹고 하는 일이 정부 까기 이므로, 한번 정부가 마음에 안들기 시작하면 선택적 지각을 통해 ‘정부=악’이란 자신의 논리를 보강할 재료가 도처에 널려있다. 그래서 요즘엔 어느 나라든 취임 후 몇달만에 욕을 바가지로 먹는 거다.

일부 사람들은 시위대의 불법 행위를 주권재민의 논리로 방어하다가, 이젠 한걸음 나아가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기원전 5세기 경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최절정기를 구가했던 아테네의 성인 남성 인구는 6만명 정도였다. ΑΓΟΡΑ에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계층도 이 6만명 뿐이다. (나머지 인구 25만은 이 가장들에게 복종하는 노예나 와이프, 자식들) 게다가 이들은 다들 비슷했다. 할줄 아는게 농사,사냥,전쟁,독서 그리고 아고라에서 떠들기 정도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지금의 우리보다 인구가 1000배나 적었고, 지금에 비하면 사람의 전문성이라는게 형편 없는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체제는 잘 안굴러갔다. 중우(衆愚)정치는 발전된 방식이 아니라, 이미 실패가 검증된 방식이다.

현대 사회는 고도로 전문화된 사회이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선 자동차 변속기 윤활작용 연구에만 10,000시간을 투자한 사람도 있을꺼다. 평범한 사람 1,000,000명이서 자동차 변속기 윤활에 대해 100시간씩 연구하고 토의하여 의견을 내놓는다 해도, 10,000시간을 연구한 이 한 사람보다 더 우수한 의견을 내놓긴 힘들다. 우리는 모든 문제에 대해 우리 모두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이상한 믿음은 버려야 한다. 평범한 사람 몇만을 모아놓은 것보다도 훨씬 더 나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고, 우리가 할 일은 이런 사람을 잘 골라서 우리를 대신하게 하는 거다. 현대 사회는 인구가 너무 많고 벌어지는 일들도 너무 다양하므로, 현실적으로 민주주의체제는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이상 유지되기 힘들다.

이야기가 이상한 곳으로 샜는데.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모두의 능력은 같고, 모두가 똑같이 받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네 방에서 페라리 포스터를 떼어내라. 너만의 유토피아에선 페라리란 없으니까. 그곳엔 BMW만이 존재할 뿐이다.

ps. 여기서 BMW는 뮌헨에 위치한 어떤 회사의 생산품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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